실루엣 포트레이트 3 커팅 플로터 사용기
어릴 때 한창 픽시 자전거를 탔었는데, 당시 자주 놀러가던 픽시샵 사장님이 커다란 장치를 가지고 시트지를 잘라 각종 데칼을 만드는 것을 보고 커팅 플로터라는 물건을 처음 알게 되었다.
칼날이 좌우로, 종이가 앞뒤로 움직이며 2축으로 대상물을 커팅할 수 있는 장치로, 사람이 직접 가위나 칼로 자르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차량용 데칼, 케이크 토퍼, 종이 모형 도안 커팅, 광고용 대형 레터링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예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다양한 시트지를 사용해서 다른 장비들을 꾸미거나 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싶어서 구매를 결심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런 장비들은 크기도 크고 가격도 비싼데, 실루엣이라는 회사에서 개인용으로 사용 가능한 커팅 플로터로 카메오CAMEO와 포트레이트portrait라는 제품이 있었다. 포트레이트 기준 가격은 약 30만원 정도이며, A4 사이즈의 종이를 커팅할 수 있다. 나는 작은 스티커만 제작할 예정이었기에 이 정도 크기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구매했다.
포트레이트는 3이 2023년 기준 최신기종이며, 2와의 차이점은 칼날 깊이를 자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동칼날의 사용 가능 여부이다. 출력 품질은 동일하나 편의성의 차이인 것이다. 나는 3을 중고로 저렴하게 구했다.
박스를 열면 본체와 전원 어댑터, USB 케이블, 정품 커팅매트가 있다.
전면 덮개를 열면 내부에 좌우로 움직이는 칼날 부분과 롤러, 벨트가 보인다. 오른쪽에는 조작 버튼이 있다.
우측 뒤편에는 USB 연결 포트와 전원 포트가 있다. 요구전압/전력은 DC 24V 1.25A이며 평범한 5.5*2.1 배럴잭을 사용하여 기본 어댑터가 손망실되어도 24V 2A 어댑터를 쉽게 구해서 대체할 수 있다. 극성도 평범하게 positive-center이다.
정발품 답게 KC인증도 있다.
실루엣 포트레이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실루엣 社의 전용 프로그램인 실루엣 스튜디오를 설치해야 한다. 개인용인 베이직 에디션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으며 상업용 버전은 유료이다.
프로그램은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으며, 외곽선이 분명한 투명 PNG 파일을 넣으면 자동으로 외곽선 벡터를 생성한다. 도안의 가장자리에 적색으로 표시되는 라인이 실제 칼날이 지나가는 부분이다. 가능하다면 도안을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하는 것이 출력 퀄리티를 더 높일 수 있겠지만 해상도 높은 비트맵 도안도 출력 품질에 문제가 없었다. 기기 종류와 종이 크기를 설정하고 출력 영역 내에 도안을 원하는 크기로 배치하면 된다.
도안 배치를 모두 마친 후 기기를 연결하고 전원을 켜면 프로그램에서 기기가 인식되며, 상단에서 보내기 탭으로 이동하여 상세 커팅 설정을 할 수 있다.
칼날 깊이는 0부터 10까지 있는데, 너무 낮으면 시트지가 제대로 잘리지 않고 너무 깊으면 시트지를 넘어 커팅 매트를 긁거나 잘라버린다. 커팅 매트는 비싸므로 낮은 것부터 하나하나씩 테스트하는 편이 좋다. 나는 시트지만 깔끔하게 잘리고 이형지는 잘리지 않는 정도를 2에서 찾았다. 10은 대체 어디에 쓰는걸까 싶긴 한데, 두꺼운 종이나 얇은 펠트지도 자를 수 있다고 하니 사용 목적에 따라 세팅값을 찾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칼날은 사용하면 할 수록 점점 닳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기존 세팅으로 잘 안 잘리게 되면 점점 깊이를 늘려가며 사용할 수도 있다.
강도는 사실 잘 모르겠는데, 깊이랑 별개로 대상물이 질긴? 정도에 대응하는 것 같다. 그냥 15~17 정도로 두고 쓰니 문제 없었다.
통과는 몇 번 자를 것이냐를 나타낸다. 종이나 시트지를 자를땐 보통 한 번이면 된다.
속도는 말 그대로 자르는 속도이다. 너무 빠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4 정도로 쓰는 편이다. 기기로 대량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최적의 속도를 찾을 필요가 있겠지만 개인용이라면 그냥 실수 없이 재료를 아끼는게 제일 중요하다 보니.
세팅을 전부 마치고 하단의 파란 보내기 버튼을 누르면 커팅이 시작된다.
그런데 보내기를 누르기 전에 기기에서 할 일이 있다.
먼저 자를 대상을 로드해줘야 한다. 나는 시트지를 자를 것이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로 시트지를 재단해서 커팅매트에 붙이고, 롤러에 좌우를 맞춰 밀착시킨 뒤 우측의 위쪽 화살표 버튼을 눌러 로드 시켰다.
이후 보내기를 누르면 자동으로 칼날 깊이를 세팅하고 커팅이 시작된다.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나며, 덮개를 덮으면 소음을 조금 줄일 수 있다.
첫 출력물. 일부러 복잡한 문자가 많은 HPE 로고를 커팅해봤는데, 필요없는 부분을 떼어내면서 상당히 고생했다. 강도를 더 높게 줘야 할 듯 하다. 그래도 일단 커팅 자체는 매우 깔끔하게 잘 되었다.
잘 커팅되는 것을 보고 다른 시트지도 적당히 구해봤다. 홀로그램이나 미러크롬 같은 특수한 색의 시트지를 사용가능하다는 점은 인쇄물과 차별되는 장점이다. 눈금이 보이는 시트지는 부착 보조용 시트지인데, 글자같이 여러 복잡하고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출력물을 대상에 옮겨 붙일 때 한번에 정확한 각도와 간격으로 붙일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홀로그램 시트지도 커팅해 보았다. 출력하고 테두리를 떼어낸 뒤 개별로 잘라두면 스티커같이 보관할 수 있다.
AR87에 붙인 Cherry 로고.
사촌이 뽑아달라 해서 해본.. 이런 짓거리도 가능하다. 이미지를 커팅용 도안으로 만드는 방법은 노가다밖에 없다. 사촌놈의 노트북 상판때기에 붙었다.
최대한 작게도 출력해봤다. 가로폭이 3cm인데, 해상도가 상당히 좋다. 다만 이 정도로 작게 출력하면 시트지 자체의 부착력이 너무 약해서 종이 같은 데가 아니면 부착은 불가능하다.
저번 포스팅에서 등장한 장비 라벨링도 포트레이트를 이용한 것이다.
다양한 시트지를 이용한 출력물들.
솔직히 장난감으로만 쓰기엔 좀 비싼 장비이긴 하다. 장비가 30만원에 시트지 값만 해도 A4 열장분량 한 롤에 5천원씩에, 칼날 마모되면 또 리필도 사야 한다.
그런데 사고 싶어서 그냥 샀다. 재밌으면 된 거지.
다른 용도를 찾아보자면, 단순 시트지 커팅 스티커 만들기 말고도 라벨지에 프린터로 인쇄한 뒤에 외곽선을 자르는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다. 또 내 취미 중 하나엔 큐브 퍼즐 모으기도 있는데, 색상별 시트지만 구하면 큐브용 시트지도 제작 가능할 것 같다. 특히 특수 큐브류는 시트지를 따로 구할 수 없어서 한번 손상되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면을 스캔해서 도안을 직접 만들면 되겠다.
3D 프린터와 라벨 프린터에 이어 커팅 플로터까지, 방구석 메이커스페이스가 알차게 채워지고 있다.